가장 많은 위스키 증류소를 가지고 있는 국가. 스코틀랜드
위스키 생산국 중 스코틀랜드(Scotland)는 가장 높은 인지도와 역사를 자랑합니다. 세계에서 위스키 증류소가 가장 많은 국가이기도 하죠. 아일랜드와 더불어 위스키의 종주국으로 군림해온 스코틀랜드. 그들의 위스키인 스카치위스키 (Scotch Whisky)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아일랜드에서 증류 기술을 얻다.
증류 기술의 시작은 중국과 이집트였습니다. 그들은 향수를 만들기 위해 증류 기술을 발견하게 되죠. 이 기술은 수도사들에 의해 유럽 전역에 알려지게 됩니다.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인 성 패트릭 또한 이러한 역사 중 한 명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에는 아일레이(Islay) 섬이 있습니다. 이 섬은 북아일랜드의 앤트림 해안의 부시밀즈, 자이언츠 코즈웨이와 인접해 있습니다. 항해 기술이 크게 발전되지 않았더라도 증류 기술을 전파할 수도사가 이동하기는 충분하였겠죠.
스코틀랜드에서 최초로 위스키의 흔적이 드러난 것은 1495년의 일입니다. 당시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4세는 아래와 같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수사 존 코어의 아쿠아비트(Aquavit) 생산용 맥아 8포대’
-1495년 스코틀랜드 재무부 문서
수도사에 의해 개발된 증류 기술은 곧 농부들에게도 전파되었습니다. 곡물 보존 기술이 미약하였던 당시에는 잉여 곡물은 금세 썩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농부들은 위스키를 생산하게 됩니다
스코틀랜드 정부의 개입과 자코바이트의 난
16세기에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위스키 생산이 성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법원이 위스키 생산에 관여하게 됩니다. 1505년. 에든버러 외과의사 길드가 아쿠아 비테 생산의 독점권을 받게 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644년에는 증류주에 처음으로 주세가 부과되었습니다. 법으로 인가된 상업 증류소들은 17세기 후반까지 운영되었습니다. 이 시기 인가받은 증류소 중 포브스 증류소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컬로든의 던컨 포브스가 세운 페린토시의 증류소였습니다. 이 증류소는 1670년부터 1689년까지 위스키를 생산하나, 자코 바이트 반란으로 인해 불타버리게 됩니다.
자코 바이트의 난(Jacobite risings)은 1688년에서 1746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이 반란의 목표는 스튜어트 왕가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좌에 앉히는 것이었습니다. 이 당시 잉글랜드의 통치자는 진을 영국에 유행시킨 왕. 윌리엄 오렌지였습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포브스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왕가에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반란이 끝난 후. 충성에 대한 보상으로 페린토시 지역에서 면세로 위스키를 생산할 수 있게 됩니다. 덕분에 100년의 시간 동안 4개의 증류소가 늘어났고. 인가된 위스키 생산량의 2/3를 포브스 가문에서 생산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탄생한 인물이 바로 스코틀랜드 출신의 천재 시인. <오두막 집의 토요일 밤>을 지은 로버트 번스(Robert Burns, 1759~1796)입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위스키를 몹시 사랑하였습니다. 결국 말년에는 과다한 음주로 건강과 재산 모두를 잃게 되었다고 합니다.
달빛지기와 하이랜드 위스키
18세기에 접어들자 위스키의 인기가 더욱 늘어나게 됩니다. 1736년 진(Gin)의 피해로 인해 영국과 스코틀랜드 전체의 진에 세금이 부과됩니다. 하지만 위스키에는 적용되지 않았죠. 덕분에 진을 대신해 음용할 술을 찾던 사람들에게 위스키는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생산량이 약 38만에서 105만 정도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증가폭을 보여주었죠. 1736년 ‘위스키(Whisky)’에 근접한 표현이 등장하였습니다. 영국 장교의 서신에서 ‘Usky는 스코틀랜드의 자랑.’이라는 내용이 발견된 것이죠. 이 ‘Usky’가 변형되어 ‘Whisky’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것과 비슷한 언급은 이보다 약 120년 전인 1618년에도 발견되었습니다. 이 해 하이랜드의 한 농장의 장례 기록에서 'Uiskie'라는 언급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18세기에는 집집마다 위스키를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이 마실 목적으로 위스키를 증류할 경우 세금도 부과되지 않았습니다. 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천국이었겠죠?. 소작농들은 190L 이하의 개인용 증류기를 사용하여 위스키를 만들었습니다. 지주들에게 임대료 대신 위스키를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1779년. 개인용 증류기의 용량 한계가 종래의 38L에서 7.5L로 제한되어 버립니다. 세무관에게는 이를 위반하는 증류기는 파괴, 몰수할 수 있는 권한까지 주어졌죠. 1781년. 결국 개인 증류는 모두 불법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시기부터 개인, 소규모 증류소들은 눈길이 닿지 않는 하이랜드(Highland) 골짜기로 숨어들었습니다. 법의 눈을 피해 그들은 동굴 등의 눈에 안 띄는 장소에서 밀주를 만들어냈습니다. ‘달빛지기’의 탄생이죠.
아이러니하게도. 이 상황에 의해 스코틀랜드의 위스키는 더욱 빠른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제조업자들은 세관원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석탄 대신 이탄(피트, Peat)을 사용합니다. 스코틀랜드 전역에 넓게 분포하고 있어 쉽게 구할 수 있었고, 석탄만큼 불이 잘 붙었기 때문이죠. 거기에 몰래 만든 것이다 보니 밀수로 처리하지 못한 잔량이 발생했습니다. 그 잔량은 당시 많이 소비되던 셰리 와인 오크통에 담아 두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오크통을 열어 보니 이전과는 전혀 다른 풍미를 가진 술이 되었습니다.
이탄으로 인해 훈연향이 생겼고. 쉐리 오크로 인해 호박색의 아름다운 색이 생겼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랜 시간이 술을 숙성시켜 풍미가 완성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진정한 스카치위스키를 만들어가는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밀주가 시작된 이후. 상업적으로 운영되던 증류소들은 더욱 확고부동한 위치에 오릅니다. 같은 시기. 하이랜드(Highland) 지역은 위스키 밀주가 점점 증가하였습니다. 골짜기, 계곡, 언덕, 지하실 등 다양한 장소에서 밀주는 하나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1784년. 하이랜드 라인 북부의 소비세를 낮추는 발효법(Wash Act)이 발표됩니다. 법의 내용은 증류기 크기를 76리터로 제한. 연간 생산량 1갤런 당 1파운드의 세금이 부과되는 것이었습니다. 세금이 낮아지자 불법적인 증류소들이 합법적으로 운영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이랜드 위스키 역사상 가장 큰 발전을 이루어낸 시기입니다.
로우랜드(Lowland) 위스키의 발전
1785년. 하이랜드 위스키의 고속 성장에 제동이 걸립니다. 스코틀랜드 정부는 하이랜드에서 생산된 위스키를 로우랜드 지역으로 수출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덕분에 로우랜드의 위스키 애호가들은 자급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요가 늘자 당연스럽게 로우랜드의 위스키가 발전하게 됩니다.
로우랜드 증류소들은 발효법 이후 높은 세금을 냈습니다. 그러나 남부 스코틀랜드, 잉글랜드에 대한 판매독점권을 받게 되었죠.
끝없는 밀주 제조
스코틀랜드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밀주는 꾸준히 생산되었습니다. 스트라스아일라(Strathisla) 증류소에서는 당시의 불법 증류기가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로크 유 증류소에는 실제로 위스키를 생산 가능한 불법 증류기도 있다고 합니다. 관광객의 체험 코스로도 인기가 높다고 하네요.

발효법 발효 이후. 페린토시는 면세 특권을 잃게 됩니다. 이에 따라 영광의 시대를 누리던 포브스 증류소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가장 훌륭한 밀주 위스키
1822년 8월. 국왕 조지 4세의 에든버러 방문을 맞아 국왕 환영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이때 조지 4세는 글렌리벳(Glenlivet)의 밀주를 맛보게 됩니다. 이 위스키에 반한 국왕은 앞으로 자신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자리에서는 반드시 글렌리벳의 위스키를 사용해야 한다는 칙령을 내립니다.
이후 글렌리벳 위스키의 수요가 증가하였음은 당연한 결과였겠죠. 에든버러는 하이랜드에 위스키 공급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 그랜트는 <하이랜드 귀부인의 회고>에서 이 위스키에 대한 감상을 나타냈습니다.
“나무통에 오래 담긴 위스키.. (중략) 우유처럼 부드러운 밀주의 진정한 맛이로다.”
당시 사람들에게 이 위스키의 인상은 가히 충격적이었나 봅니다. 이 문장은 숙성된 위스키의 훌륭한 품질을 찬양하는 최초의 표현이라고 하네요.
밀주가 성행하던 하이랜드에서는 단속을 피하기 위해 소형 증류기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구리가 알코올을 에스테르, 알데히드 등으로 변환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덕에 증류된 알코올에 풍부한 아로마를 담게 되죠. 결국 이 차이가 하이랜드 위스키의 부흥을 이끌어내게 됩니다. 억압이 이끌어낸 위대한 발견이죠.
와인에게 닥친 재앙

1860년 대 유럽에 포도농장들은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포도 뿌리를 먹고 자라는 필록세라(Phylloxera)가 기승을 부린 것이죠. 이때 와인 생산과 수입에 큰 지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영국에서는 와인, 브랜디를 대체할 상품으로 위스키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블렌딩의 시작
이 시기의 위스키는 품질이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숙성 기술이 완성되기 전이기 때문이죠. 이러한 사실은 증류 업자들에게는 크나큰 고민이었습니다.
1850년대. 주류 상인이었던 존 듀어(John Dewar)와 아서 벨(Arthur Bell)은 여러 증류소의 위스키를 섞어 이 격차를 좁힐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블렌딩 기술의 시작이자. 블렌디드 위스키(Blended Whisky)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증류주 상인. 앤드류 어셔는 블렌딩에 그레인위스키를 사용합니다. 당시 그레인위스키는 향미가 약한 단점 때문에 싼 가격에도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과감히 싱글 몰트와 그레인의 조합으로 블렌디드 위스키의 틀을 확립하였습니다.
1890년대 위스키 산업은 조니 워커, 시바스 브라더스, 제임스 뷰캐넌 등으로 대표되는 마스터 블렌더들의 호황기였습니다. 존 듀어의 아들인 토미 듀어가 역사적인 위스키 회사. 듀어스의 지사를 32개나 설립한 것이 당시 위스키 산업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실이죠.
블렌디드 위스키의 몰락
스페이사이드(Speyside), 캠벨타운(Campbell Town) 등 스코틀랜드 전반에서 큰 호황을 누리던 블렌디드 위스키. 그러나 그 호황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로버트 패티슨과 윌터 패티슨은 회사 운영에서의 부정. 싸구려 위스키를 착색한 정도에 그친 제품을 ‘최고의 글렌 리벳 블렌디드 위스키’로 과대광고를 한 탓에 부도를 맞이합니다. 이 덕에 위스키 시장 전체가 휘청이게 되었죠. 해외 무역과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힌 ‘보어전쟁’ 또한 이를 가속시킵니다.
알렉산더 칵테일의 역사에서 등장한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7세 또한 이 행진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는 애초에 프랑스 와인과 브랜디를 선호하였고. 위스키를 거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블렌디드 위스키와 몰트 증류소 업자 간의 갈등도 심화되었죠.
패티슨의 구속과 항소의 과정에서. 1915년 비숙성 증류주 법안이 만들어집니다. 이 법안으로 인해 3년 미만의 증류주는 위스키로 인정받을 수 없게 됩니다. 이 엄격한 법안은 영국의 재무부 장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추진한 법입니다. 이 법안은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죠. 당시와는 달리 지금에 이르러서는 위스키의 품질을 보증하는 법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 법안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증류소 허가세와 위스키 주세가 가파르게 상승되었죠.
위스키 증류소의 불행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1917년에는 수출이 금지되었고. 그 다음해에는 위스키의 세금이 두 배가 되었습니다.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위스키 업자들은 막대한 손해를 봐야 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위스키 업자들은 밝은 내일을 기대했지만. 그것은 허황된 꿈이었습니다. 1919년 세금은 더욱 인상되었고. 1920년에는 금주 운동이 진행됩니다. 쐐기를 박은 것은 미국으로. 이 시기는 바로 금주령이 발효된 시기였습니다.
위스키의 부활

기나긴 위스키의 불황은 1980년대가 되어 끝마쳤습니다. 60년대부터. 증류자연합(United Distillers, 디아지오의 전신), 페르노리카, 에드링턴 등. 거대 자본들에 의해 많은 위스키 증류소들이 인수, 합병을 거치게 됩니다.
이에 글렌피딕과 발베니를 소유하고 있던 회사. 윌리엄 그랜트&선즈는 1960년대 생산된 위스키를 싱글 몰트 위스키로 판매할 결정을 내립니다. 당시 업계에서는 이 선택을 비웃었지만, 결국 웃는 것은 그들이었죠.
기나긴 역사를 지닌만큼 암흑기도 길었던 스카치위스키(Scotch Whisky). 세계적인 증류주로 발전. 많은 사랑을 받기까지의 노력을 스코틀랜드의 많은 사람들은 현재까지도 지속하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스카치 위스키의 역사 포스팅에 활용된 사이트 및 서적 리스트입니다.
<위스키 대백과> – David wishart 지음, <위스키는 어렵지 않아>
<싱글몰트 위스키 바이블> – 유성운 지음
the Scotch Whisky Experience (https://www.scotchwhiskyexperience.co.uk/about/about-whisky/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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